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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십자군, 형제에게 칼을 겨누다 PART 3

by bookish person 2021.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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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유럽 국가들은 자신을 새로운 십자군으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잔혹한 이교도의 땅에 기독교 문명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은 그들의 탐욕을 정당화시켜 주곤 했다. 더 나아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앞 다투어 자기 나라의 십자군 지휘관들을 영웅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영국은 리처드 1세를, 독일은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22?~1130)를, 프랑스는 고드푸르아 드 부용(Goderfroy Bouillon, 1060?~1100)을 치켜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반면, 이슬람권에서 십자군은 20세기에 접어들때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슬림은 십자군 전쟁을 '프랑크족의 침입'이라 부르곤 했다. 그들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장구한 이슬람 역사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상처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탄생,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슬람 국가들은 십자군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되었다. 분열된 이슬람 국가들과 그 틈을 노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운 서방 국가들의 간섭은 700여 년 전의 상황과 너무 닮아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십자군에 맞선 지하드'를 선언하고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이 자신을 '아랍 세계를 단결시킨 새로운 살라딘'이라고 줄곧 주장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십자군은 처음부터 권력 갈등이 빚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자비의 종교인 이슬람과 기독교는 결코 절대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18세기 유럽의 지성 볼테르(Voltaire, 1694~1778, 프랑스의 게몽 사상가 * 작가)는 십자군을 '권력에 미친 성직자들이 벌였던 무자비한 전쟁'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전(前) 교황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2, 1920~2005)는 2003년, 십자군 전쟁은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하나라며 정식으로 참회하기까지 했다.

십자군과 기사도에 불타는 경건한 기사는 지금도 동화나 영화 속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그려지곤 했다. 완벽한 이상은 세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는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다.

나는 선하고 상대는 없어져야 할 악이라는 생각은 세계를 끝없는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버리면, 세상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가득한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꿈꾸는 사랑과 기쁨느로 충만한 세상은 십자군이나 성전과 같은 극단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손을 내밀 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대 십자군 정신은 인류에게 관용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하고 폭력에 휩싸이게 하는 정신의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십자군 전쟁이 남긴 것

최근 학계에서는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성지 회복'을 넘어서 유럽 기독교와 이교도와의 분쟁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는 경향이 있다. 13세기에 이단, 교회의 적에 대한 십자군 운동은 성지 회복을 위한 원정만큼이나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에프 파냐를 점령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려는 '레콘키스타'운동은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성지 회복과 같은 거룩한 전쟁으로 여겨졌다.

십자군 전쟁 결과, 유럽은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먼저 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전사하여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왕권 강화로 이어져서 근대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반면, 잇따른 원정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1309년에는 교황이 프랑스 왕에게 쫓겨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는 일까지 생긴다. 그 후 로마 교회는 이전의 권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십자군 전쟁은 문화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이슬람권 세계는 성서의 권위에 짓눌려 학문 발전이 정체되어 있던 유럽에 비해 훨씬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선진 문물이 전쟁과 함께 아랍에서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대수학(algebra),알코올(alcool),설탕(sucre)등의 말들은 모두 아랍에서 왔다. 아랍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철학적이라도 십자군 전쟁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잊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전쟁과 함께 다시 유럽으로 전해 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독교 신학에 녹아들어, 이후 교회의 위상과 체계를 재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쇼크, 암흑시대를 흔들다

토마스 아퀴나스

"나는 이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내가 한 신비한 체험에 비하면)

지금까지 써 온 모든 것은 한갓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 신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한 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비서에게 전한 말

아퀴나스, 기독교 전쟁을 종식시키다.

예수(Jesus christ, 기원전 4?~30?)의 언행을 기록한 <신약 성경>은 원래 헬라 어로 되어 있다. 헬라 어는 그리스 어의 다른 말이다. 그 당시 국제 언어는 그리스 어였는데, 헬라 어는 요즘으로 치면 '이태인 상인들이 쓰는 영어 정도'가 될 듯싶다.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문법과 단어로 이루어진 서바이벌 잉글리시, 그게 바로 헬라어다.

성서 기록자들은 왜 예수의 말씀을 이같이 수준 낮은 언어로 적었을까? 그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이 가난하고 못 배운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에 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하려다 보니, 시장통에서 쓰이는 말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의 주장은 아주 간단한 언어와 쉬운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어려운 논리보다 더 크고 깊은 울림을 준다.

예수는 로마 제국 변방에 살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젊은이의 가르침은 결국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가 죽은지 300여 년 뒤,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4~337) 황제는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유럽의 1000년의 역사는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교회를 뜻하는 가톨릭(Catholic)이란 단어는 '보편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katholou'에서 왔다. 예수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유럽의 보편적인 문화와 정서가 되었단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만큼 성장통이 심했던 종교도 드물다. 밖으로는 마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들과 끊임없는 경쟁을 해야 했고, 안에서는 교파 간에 목숨을 건 치열한 논쟁을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투쟁은 창조의 아버지다. 초창기의 조악했던 기독교 철학은 갈등과 경쟁을 겪으면서 점차 세련된 이론으로 다듬어졌다. 그리고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을 정교한 이론 체계로 정립해냈다. 그중에서도 '스콜라 철학의 왕'으로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가로 손꼽힌다. 187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 1810~1903)는 "가톨릭에서는 아퀴나스의 철학이 언제나 옳은 길이다."라고 선포했다. 이렇게 보면 성(聖) 토마스는 지금도 가톨릭 교회의 '공식 대변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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