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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세상을 둘로 가르다 PART 1

by bookish person 2021.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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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세상을 둘로 가르다

6 · 25 전쟁

그들은 가고 나는 남았다. 남은 자에겐 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희망이라 이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만이 이 무정한 세월을

이겨나갈 수 있으므로....... “.......“

- 6 · 25와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하림의 마지막 대사

아직도 살아 있는 전쟁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시(戰時) 상태에 있다. 19506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3년에 휴전 협정은 말 그대로 ‘휴전’일 뿐 ‘종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우리 생활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엄청난 국방비는 고스란히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적국(敵國)의 하늘과 땅을 가로지를 수 없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경제적 손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보다 직접적으로 전쟁은 이 땅의 젊은이 하나하나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분단 상황 때문에 이 땅의 청년들은 꽃 같은 20대의 일 부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6 ·2570년 가까운 생활 동안 우리 생활을 짓누르는 살아 있는 전쟁으로 계속되고 있다.

사상이 전쟁을 부르다

세계 전사(前史)로 볼 때 6 ·25는 꽤나 희한한 전쟁에 속한다.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종교 문화적 갈등 때문에 빚어진 전쟁은 아주 흔하다.

그러나 6 ·25는 특이하게도 사상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20세기 초엽에는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세상을 떠돌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가진 자(부르주아)들이 못 가진 자(프롤레타리아)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서 사회의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산업이 발전할수록 빈주 격차는 점점 심해지며 부()는 더욱더 소수의 사람들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은 심해질 터이며, 마침내는 폭력 혁명에 의해 절대 다수인 프롤레타리아들이 부르주아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하루빨리 일하는 자들의 세상이 올 수 있도록 노동자 · 농민들이 단결 투쟁해야 된다고 외친다.

공산주의는 경제공황과 빈부격차 등 자본주의의 문제가 절정에 달했던 20세기 초에 매우 호소력 있는 이론이었다. 공산주의는 기득권층에게는 공공의 적이다시피 했다. 안정을 원하는 중산층들에게도 공산주의는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공산주의식의 과격한 사회변혁에는 엄청난 폭력과 혼란이 따르기 때문이다.

파시즘, 나치즘 같은 독재 이론이 득세한 데도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작용했다. 20세기 초반, 무솔리니(Benito A. A. Mussolini, 1883~1945)나 히틀러,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는 최후의 보루’ 임을’ 강조하곤 했다. 독재자들은 혁명에 대한 불안감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파시스트들의 공산주의 탄압은 묘하게도 원수지간인 자본주의의 국가와 공산주의자들이 손을 잡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과 영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게도 당시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과 일본은 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공동의 적인 독일과 일본이 무너지자 이내 갈라서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동유럽 나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이며 세계 공산화의 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질세라 미국 또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해 엄청난 경제 원조를 퍼부으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굳혀 갔다.

동쪽에서는 한반도가 두 이념 세력의 접점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이 무너질 당시에 미국과 소련은 모두 한반도가 상대편 손아귀에 온전히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하는 데 합의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팔선은 단순히 군사 작전상의 구분에 그치지 않았다. 이는 동아시에 있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세력권을 가르는 선이기도 했다. 그러한 세력 구분 가운데 우리 민족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둘로 나뉘어 버렸다. 세계적 이념 대결 때문에 5000년을 이어온 단일민족이 한순간에 갈라져 버린 것이다.

본전도 못 건진 전쟁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믿는다. 자본가들은 프롤레타리아가 주인 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폭력혁명으로 제거해야 할 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1948, 소련의 지원 아래 정부를 수립한 북측의 공산 정권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남측에 대한 무력 공격을 꿈꿨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네들이 내세웠던 ‘국토완정론’ 속에는 무력에 의한 통일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녹아 있다.

1948815, 미국의 후원을 업고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도 전쟁 의욕만큼은 결코 북쪽에 뒤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공공연한 북진통일론자였다. 그는 공산주의라는 전염병하고는 어떤 협상도 불가능하다고 천명하곤 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당시 미국에게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미국에서도 공산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1945년에 350만 명, 1946년에는 46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나라 밖 상황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급속하게 세력권을 넓혀 갔을뿐더러 중국 대륙에서도 장제스(1887~1975)의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공(反共)’은 이승만 정권에게 미국의 자원을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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