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으로 치른 인류의 성인식
프랑스혁명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인가에 대한 논쟁을 한다면...... 아이작 뉴턴이라고 대답하겠다.
우리는 진리의 힘으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폭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은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
- 볼테르, 영국 체류 중 뉴턴을 평하며
“폭풍우처럼 몰아쳐서 천둥처럼 승리할 것”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믿음은 아주 희한한 견해에 속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왕, 귀족, 평민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우리가 집안에 부모님이 있고 형제간에도 나름의 서열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여기듯, 불과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국가에는 존엄한 왕과 고귀한 혈통(귀족)이 있으며 평민들은 그들의 다스림과 보호를 받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엄한 어른이 단속하는 집안이 가풍도 재데로 잡히는 법이다. 아이나 어른 모두가 동등하고 위계가 없다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재데로 돌아가고 삶이 평안하려면 백성들은 ‘웃어른’인 왕을 잘 섬기고 자기 분수에 맞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류가 가진 보편적인 ‘상식’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이러한 상식을 뒤집어 놓은 대사건이었다. 프랑스혁명이 내세웠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은 새로운 상식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은 모두 존엄하며 누구의 자유도 부당하게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천 년간 이어져 왔던 신분에 따른 차별을 뒤엎는 작업이 결코 평탄했을 리 없다. 그 당시의 혁명가 생쥐스트(Louis A. L. de Saint-Just, 1767~1794)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자유는 폭풍우처럼 몰아쳐서 천둥처럼 승리할 것이다.” 정말 프랑스혁명은 폭풍우처럼 시작해서 천둥처럼 끝났다.
혁명의 3박자가 무르익다.
전체 유럽 인구의 5분의 1이 모여 있던 18세기 프랑스는 당장이라도 빅뱅(Big Bang)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였다. 민주주의의는 경제적 번영과 함께 싹트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던 당시는 서유럽의 경제 성장이 두드러졌던 때다.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 늘었고, 공업 생산과 시장 규모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부(富)를 쌓은 상인과 법률가 등 이른바 평민 부르주아(Bourgeois) 역시 많이 늘어나 있었다. 실력과 재산을 갖춘 이들이 귀족의 오만을 감당하기란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터이다.
더구나 그 당시 프랑스는 빈부 격차가 아주 심했다. 프랑스 인구의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귀족과 성직자가 전체 토지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80퍼센트에 이르는 농민은 각종 부역과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 국왕이 백성을 돌본다는 그 시대의 ‘상식’은 농담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국가를 한 사람에 비유하자면, 프랑스는 ‘사춘기 소년’에 가까운 인구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인구 통계학적으로 20~30대의 젊은 층이 많은 나라일수록 혁명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는 전체 인구 가운데 제~40대가 40퍼센트나 됐고, 20대 미만도 36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러니 프랑스는 경제 성장으로 높아진 평민의 자존심, 신분에 근거한 불합리한 착취 구조, 혈기 넘치는 인구 구성이라는 혁명의 3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거기다 ‘명예 혁명’‘명예혁명’으로 국민의 대표인 의화가 권력을 쟁취한 영국의 상황과, 영국 국왕의 지배를 거부한 1776년의 미국 독립 선언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저항 정신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왕권신수설 vs 사회계약설
그러나 아무리 시대 여건이 뒷받침해 준다 해도 철학이 없다면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철학은 폭동과 혁명을 구분시켜 주는 중요한 잣대다. 이념 없이 폭발한 시위와 반발은 그 순간이 지나면 이내 잠잠해진다. 하지만 철학은 불만에 차 들고일어난 시민들에게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한 로드 맵(road map, 앞으로의 계획이나 전략 등이 담긴 구상도 · 청사진)을 제공한다. 그래서 폭력을 새로운 세상을 여는 동력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면 18세기 프랑스를 변혁시킨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학자들은 프랑스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 로크(John Lockke, 1632~1704)의 철학을 꼽는다. 하지만 그 당시 권력자들은 통치의 근거를 이른바 ‘왕권신수설’에서 찾았다. 왕권신수설의 대표주자 격인 필머(R. Filmer, 1588?~1653)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왕이 될 권리를 오직 한 사람에게 부여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담이다. 아담은 전 인류의 아버지다. 그리고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왕은 이 아담의 상속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듯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왕에 대한 불복종은 신을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서유럽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왕권신수설은 꽤 설득력이 높은 학설이었다. 하지만 로크는 여기에 ‘사회계약설’‘사회 계약설’로 맞섰다. 그는 왕이 될 권리는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왕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로크는 국왕도 정부도 없었던 ‘자연 상태’를 가정하여, 권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러나 살다 보면 충돌과 다툼은 늘 일어나게 마련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이를 괴롭힐 때 누군가 이를 막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네 삶은 이내 폭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통치자를 세우기로 ‘계약’을 맺었다. 마치 동네 주민들이 합의 아래 자치회를 구성하듯 그렇게 국왕을 세웠다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통치자가 사람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권력을 이용하여 착취하고 괴롭힌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에 대해 로크는 단호하게 말한다. 개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폭력을 써서라도 몰아내야 한다고 말이다. 곧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국민의 뜻을 살릴 수 있는 통치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로크의 주장은 권력의 원천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 주권론’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게다가 그 당시는 과학의 발달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왕권신수설의 근거가 되는 성경의 권위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을뿐더러 볼테르 같은 인기 작가들도 귀족과 성직자들을 비꼬는 글로 큰 반응을 얻고 있던 시대였다. 그만큼 절대 권력은 기반을 잃어 갔고 대중 사이에는 특권층에 대한 대한 거부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