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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으로 치른 인류의 성인식 PART 2

by bookish person 20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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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혁명은 그 시대의 가장 민감한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때만 해도 프랑스 왕정은 수많은 전쟁과 낭비벽으로 극심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한데도 백성들이 돈을 내놓지 않자, 루이 16(Louis XVI, 1754~1793)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란 제1신분인 성직자, 2신분인 귀족, 그리고 대다수의 평민으로 이루어진 제3신분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는, 일종의 국민 대토론회였다.

삼부회에서는 제1신분과 제1신분이 힘을 합쳐 제3신분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던 것이 관례였지만, 세력이 커진 제3신분은 더 이상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순순히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더 많은 투표권을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17895,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국민 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회의 장소를 폐쇄해 버리자 이들은 근처 테니스 코트로 가서 프랑스를 위한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다. 이것이 이른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프랑스혁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1789714, 혼란스러운 정세와 치솟는 빵값에 분노한 파리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 3신분을 길들이기 위해 왕과 귀족들이 비밀회의를 하여 빵값을 일부러 올렸다는 뜬소문이 거리 곳곳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탓이다. 이로써 권력은 제3신분의 손에 완전히 넘어오게 되었다.

국민 의호히는 17898월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 불리는 인권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는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다. 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부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며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 이 선언은 이후 근대 민주주의에 토대가 되었다. “모든 주권의 원천은 국민에게 있다.” (2), “자유의 제약은 오직 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4), “사상과 의사의 자유로운 교환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권리의 하나다.”(11), “소유권은 그 무엇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17) 등 모두 17조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선언문은 이제 보통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국의 목마른 발고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

그러나 혁명은 이성적으로만 진행되지는 안았다. 고결한 이념과는 달리 이후 프랑스혁명은 피와 폭력으로 얼룩졌다. 프랑스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라의 백성들도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 여러 국가와 전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왕이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는 음모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혼란한 상태에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안건보다 가장 극단적인 선동이 호응을 얻기 쉽다. 정권은 시민들 사이에 모든 불평등과 저치적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던 급진적인 자코뱅당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정치적 살해를 혁명의 수단으로 삼는 끔찍한 공포 정치를 단행했다. 수천 명의 귀족들이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목이 잘렸고, 1793년에는 루이 16세마저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학자들에 따르면, 혁명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무려 1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왕당파(국왕 지지파)가 반란을 일으킨 방데 지역에서는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참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혁명의 적으로 몰린 이들을 빨리 살해하기 위해 죄수들의 손발을 묶어 배에 태운 뒤 가라앉히는 잔인한 처형이 국가적 목욕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안타깝게도 대다수 희생자는 혁명과 별 상관없는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빌린 폭력은 프랑스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자행되었다. 그 당시 유럽의 지성들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에 열광하며 축배를 들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시대 최초의 철학자였던 헤겔(Georg W. F. Hegel, 1770~1831)은 철학자 셸링(Friedrich W. J. von Schelling, 1775~1854), 천재 시인 횔덜린(Johann C. F. Holderlin, 1770~1843)과 혁명을 기념하여 튀빙겐 숲에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헤겔은 나중에 <정신 현상학>에서 역사는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국가에서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였지만, 서양 중세에는 군주뿐 아니라 봉건 제후들도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예나 대학에 입성하는 나폴레옹(Napoleon I, 1769~1821)을 바라보며 나는 말을 탄 절대정신(시대정신)을 보았다.”라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

그러나 그 시대정신의 군대는 헤겔의 집을 약탈하고 그의 밥줄이었던 대학을 폐쇄했다. 혁명의 이상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혁명의 현실은 잔혹하고 처참했다. 혁명때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국가(國歌)로 불리는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에는 조국의 목마른 밭고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흐르도록”이라는” 잔인한 문구가 담겨 있을 정도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성인식

결과만으로 보면 프랑스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다. 1815, 프랑스는 다시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Louis X, 1755~1824)가 다스리는 왕정 체계로 돌아갔다. 혁명의 잔인함과 피로감은 과거 질서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는 더 이상 유럽의 다른 왕국에 맞설 힘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 당시에 일어났던, 평등을 향한 개혁 정신은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와 법 앞에서의 평등은 이미 시대의 대세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호에 만족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서양 정신이 아버지 같은 신과 왕에게 기대어 안온함을 찾는 어린아이와 같았다면, 이후 서양 사상은 국민 자신이 세상의 주인임을 인식하는 성년(成年)의 철학이라 고 할 수 있다.

혁명 이후 서양 사상이 성년의 철학으로 커 나가는 데는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경제가 급성장했다는 사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절대 권력자 밑에서 욕구의 절제를 강조하던 철학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오히려 왕성한 소비 욕구와 창조적 능력을 갖춘 개인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프랑스혁명은 개인의 가능성이 억눌려 있던 세상에서, 자유를 마음껏 펼치는 성숙한 개인들의 평등사회로 흘러가는 인류의 성인식(成人式)’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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